2023년 09월 05일

허드렛일에 진심이면 벌어지는 일 2

By In DAILY

허드렛일에 진심이면 벌어지는 일 1
허드렛일에 진심이면 벌어지는 일 완결

성정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를 하기로 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내고, 시간이 남으면 내가 할만한 일이 없나 기웃거리는 태도가, 진가를 발휘한 건 대학생 때였다.
국가장학생으로 학교 재단에서 일했는데 2학년 1학기부터 5학년 1학기까지 4년을 근속했다.

첫날이 기억난다.
그 이유는 할 일이 하나도 없어서 컴퓨터 앞에서 4시간을 가만히 앉아있다 퇴근했기 때문이다.
재단 선생님들께서도 시킬 일이 없다며 앞으로 차차 할 일을 알아보자 하실 정도였다.
누구는 월급루팡이네! 아싸뵹! 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좀이 쑤셨다.

선생님들 업무 패턴을 보니 아침 회의 전 재단 소속 카페에서 커피를 가져오는 일이 있길래 그것부터 내가 한다고 했다.
애기(?)한테 그런 일 시키실 수 없다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으니 그런 거라도 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카페 언니들하고도 친해졌다.
덕분에 학교 다니는 내내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다음은 창고 정리였다.
재단에서는 학교 기념품을 팔았다.
일손이 모자라서 기념품 재고들이 창고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정리하겠다고 했다.
반팔티부터 패딩까지 색상과 사이즈별로 맞춰 쌓아두었고, 키링, 컵, 달력, 노트 등 모든 품목에 대한 재고조사 후 엑셀 시트를 만들었다.
서랍장 안에 넣은 것들은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사진을 찍어 프린트해서 서랍문 앞에 붙여놨다.
이때부터 예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 잘하는 학생으로 거듭났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선생님들 자리를 기웃거리면서 뭐 시키실 일은 없으시냐 했더니 통장 15개가 든 에코백을 주시며 통장정리를 비롯한 은행 업무를 맡기셨다.
이후로 선생님들께서 너 믿어도 되니? 라고 말씀하시면 은행 업무를 맡기겠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녀왔다.
학교 담당 은행원님과도 친해져 그때부터 주택청약적금을 들었다.

일 잘하는 학생에서 믿을만한 놈으로 진급하고 나니 더 많은 일들을 맡기셨다.
– 카페 정산 : 각 메뉴별 매출 정리, 재료 재고 확인 후 주문하기
– 카페 대타 : 카페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아주 바쁜 시간에 잠깐 내려가 돕기, 카페 언니들 휴가에 맞춰 지원 나가기
– 후원자 연락 : 몇백 명의 후원자님들께 전화를 돌려 후원의 밤 참석 여부나 기부금 영수증 발행 주소 여쭙기
– 우편 업무 : 몇백 명 정도 되는 후원자분들의 주소를 라벨 프린트해서 봉투에 붙이고 우체국 가서 우체국 직원분이랑 함께 우편물 스티커 붙이기
– 후원 행사 참여 : 선생님들 보조, 행사 스탭 통솔
– 지방 출장 : 지방 후원 행사 보조
그렇게 여기저기 불려가며 자타공인 재단의 딸이 됐다.
학교내에서도 부서마다 나를 탐내했다.
심지어 총장님 비서실에 공석이 나는데 관심 없는지 묻는 분도 계셨다.

재단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매점을 인수하던 시점이었다.
나는 재단의 모든 대소사에 참여하는 준직원이 되었다.
매점 아르바이트생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면 대타를 하러 가기도 하고 학교 내부를 돌며 자판기에 음료를 채워 넣는 일도 했다.
학생 민원 처리도 하고 정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에게 밉보인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업무가 국가장학생의 업무에 위배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선생님들은 내가 업무가 과다해서 어디다 찌른 거 아니냐며 놀리셨고, 아예 잘 됐다면서 알바비를 톡톡히 줄테니 일을 더 같이 하자 제안하셨다.

학생에게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수업 시간과 국가장학생으로 배정된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최저시급*150%로 쳐주시겠다고 했다.
방학은 아예 월급으로 계약하자고 하셨다.
큰 후원행사의 경우 프리랜서로 계약도 하자고 하셨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시간 났을 때 하면 좋을 일들을 짬 내서 부지런히 했을 뿐인데,
할 일이 하나도 없던 곳이 생활비의 몇 배를 주는 직장이 되어있었다.

Written by hershey

안녕하세요 걀걀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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