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휴지를 다 썼다.
새로운 휴지로 갈아끼우기 위해 여분의 두루마리 휴지가 있는 옷방으로 갔다.
큰 책상 아래 수납함들 옆에 봉지가 푹 꺼진, 거의 다 써가는 두루마리 휴지 더미가 있었다.
그걸 꺼내기 위해 허리를 숙여 봉지 안에 손을 집어넣고 몇 번 휘휘 헤집어 하나를 꺼냈다.
화장실로 다시 돌아와 휴지를 갈며 여분의 두루마리 휴지를 수납해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지를 꺼내러 갔을 때 그 옆에 놓여있는, 천 수납함에 담긴 겨울 이불 더미들도 봤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그것들을 꺼내 세탁을 해야 한다.
희뿌옇게 쌓여있는 먼지를 보며 재채기를 얼마나 하게 될까 아득해졌다.
여름에는 겨울철 이불을, 겨울에는 여름철 이불을 넣어 둘 장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즐겨 입던 기모 맨투맨을 입으려 옷더미를 뒤적거렸다.
맞다.
6개월 전 두루마리 휴지 옆 수납함들에 겨울옷들을 담아뒀던 걸 깜빡했다.
날을 잡아 겨울옷을 꺼내고 여름 옷을 정리해 넣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럴 일 없게 넓은 옷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여러 번 읽었던 소설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루틴이 중요한 사람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이동 시 걸음 수까지 동일하게 맞춰 생활하며 그런 완벽주의적 성향은 아침 면도물의 온도가 1도라도 달라지면 그것을 준비한 하인을 자를 만큼 강경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맞춰 세계 일주를 80일 만에 끝낼 수 있다는 내기를 하게 된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삶에는 완벽한 계획이란 없고 우여곡절은 불가피하며 빡빡하게 살다 보면 놓치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며 끝난다.
하지만 내가 감명을 받아서 반복해서 읽었던 부분은 오히려 앞부분이다.
루틴을 살 수 있게 정돈된 환경을 가졌다는 것이 내가 상상한 멋진 어른의 삶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로부터 시작된 생각이 소설을 떠올리게 한 걸 보면 여전히 어린 시절의 로망이 유효한가 보다.
그리고 어쩌면 좋은 집을 갖고 싶은 이유가 정돈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