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도 참아야 돼’는 특히 임 여사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긴 했지만.
가정교육의 무서운 점은 이해하지 못해도 체득해버린다는 거다.
내가 왜 참아야 해라며 반항하긴 했지만, 밖에 나가서는 말을 말자며 말아버리기 일쑤였다.
그게 뭔가 좀 쿨해 보이기도 했고.
참았다가 오히려 더 큰 봉변으로 돌아왔던 날도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더니 혼자 옴팡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날 억울하게 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결국 알아서 망했다.
누가 나에게 해를 끼쳐도 앙갚음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강가에 앉아 기다리다 보면, 머지않아 그 사람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고는 하는데.
시체가 떠내려오거나 말거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참는 게 답이라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 억울해 하는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억울할 줄만 알았지 억울해 하는 걸 듣는 건 또 처음이다.
듣고 있으면 속이 답답한데 처음 하는 거니 더 피곤하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걸 보고 있자면, 그걸 참아 넘겨야 하는 내가 다 억울해진다.
내가 뭐 어떻게 과거를 바꿔주리?
그런다고 달라질 것 없으니 그냥 좀 넘어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상대의 억울함에 불 붙이는 꼴이니, 또 억울해져서 참는다.
이쯤 되면 마음이 옹졸해진다.
쟤는 안 참는데 내가 왜 참아야 해.
억울함을 왜 참아야 하나요를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억울함을 참아야 하는 이유는 억울함의 윤회를 끊기 위함이라고 했다.
억울함은 풀리는 것도 아니거니와, 내 억울함을 풀고자 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억울해진다는 것이다.
알듯 말듯 하다.
그래 뭔들 명확히 알겠냐.
어쨌든 참으라 이 말 아니겠나.
안 참으면 뭐 어쩔 건데.
그건 또 그것대로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