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당에서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하는 편이다.
상대의 선택을 배려해서 상관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불호가 명확하다.
불호만 제외된다면 정말 뭐든 상관이 없다.
달리 말하면 선택을 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여기서 가장 잘하는 걸로 달라고 하거나 메뉴판에 best라고 적힌 것들을 순서대로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선택에 쏟을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가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다.
너무 많은 옵션이 있다.
가장 싼 걸 사자니 상태가 별로고, 가장 비싼 걸 사자니 가격이 부담되고, 적당한 걸 사자니 적당한 게 뭔지 모르겠다.
겨우 재료 하나에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며칠치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선정하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는 급식이 그리워진다.
이런 이유로 매번 집밥 챌린지에 실패해오다가 디스콰이엇에서 어글리어스라는 서비스를 알게 됐다.
어글리어스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폐기될 뻔한 채소들을 모아 구독으로 판매하는 프러덕트다.
겨우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쓰레기로 전락해버리는 농산물을 구출하는 재미도 있고 모종의 뿌듯함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내가 고르지 않아도 (물론 고를 수도 있다) 구출된 채소들을 랜덤하게 배분해 주는 것마저 나에게 딱 필요한 기능이었다.
한 박스에 15,000원이어서 시도를 해보는 게 크게 부담스러운 금액도 아니었다.
바로 구독을 신청했고 이번 주말이 채소 랜덤 박스를 받아보는 첫 주말이었다.
무엇을 먹을지 정해서 장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간편함이 있었다.
재료가 왔으니 해먹기만 하면 된다.
얼핏 조삼모사같이 들릴 수 있겠지만, 선택 비용 면에서 엄청난 절감이 있다.
좋아하지 않는 재료가 오면 어떡하냐는 우려는 기우다.
배송 리스트에서 제외하면 된다.
딱 한 끼 해먹을 만한 양이 오는 것도 간편함에 한몫한다.
잔여분을 저장해둘 공간과 용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매번 채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법을 찾아보고 그렇게 보관해두더라도 다음에 먹을 땐 무른 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다듬어 먹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다.
그전까지는 당연한 불편함으로 여겨왔던 부분들이 간단히 해소되었다.
그렇게 배달 온 못생긴 시금치와 마늘을 가지고 파스타를 해먹었다.
재료가 신선하니 맛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그나저나 평생 사볼법하지 않은 재료인 목이버섯이 왔다.
목이버섯으로는 무엇을 해먹을 수 있으려나?
가벼운 미션을 수행하는 소소한 즐거움까지 있다.
+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백 번의 설명 보다 한 번의 체험이 강력하다는 걸 또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