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자 타이틀이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셉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전공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갈의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비전공자는 증명해 내야 한다는 거죠.
비전공자도 충분히 현업을 할 수 있는데 무슨소리냐?라고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외주를 구할 때 비전공자와 전공자가 있으면 업력이 같다고 할 때 어느쪽을 택하시겠나요?
전공자는 어쨌든 더 어린나이부터 2-4년을 더 투자한 사람이란 뜻이고 구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습득한 지식의 양도 양이지만 환경속에서 터득하는 문화와 뉘앙스는 공부만으로 만들어지는게 아닙니다.
제 전공인 영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왕가위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중경삼림이요? 아니면 타락천사요?라고 되물을 것 같습니다.
또는 화양연화요? 아니면 해피투게더?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이 대화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분들은 대부분 전공자일 테고 전공자가 아니라면 시네필이실 거라 짐작해 봅니다.
저는 영화에 조예가 그다지 깊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아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제가 이렇게나 시간에 대한 강한 믿음(편견)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오랫동안 제가 만드는 서비스들의 기획이나 디자인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내가 놓치는 뉘앙스들이 있을 텐데,
이건 무조건 시간을 쏟아야만 해결이 되는 부분일 거라,
당장 할 수 있는 건 많은 아티클을 읽고 보고 따라 하는 것 말곤 없다는 게 무기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해야죠.
그렇게 어떻게든 했더니 벌써 4년차에 접어들었고 졸업반쯤 되니까 느껴지는 뉘앙스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전공이 IT 회사를 운영하기엔 너무 대척점에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고,
이 회사에서 내가 기여하는 건 도메인밖에 없는 건 아닐까 했는데,
이게 묘한 게 웹과 개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영화랑 참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연출자가 의도한 대로 관객이 따라오게끔 구성하는 거나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유저가 사용하게끔 플로우를 짜는 것,
연출자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영화를 만들어 내는 거나
기획자가 여러 기술을 가진 개발자들과 프로덕트를 만들어 내는 것,
연출자가 예측한 대로 관객평이 나오지 않는 거나ㅠ
기획자가 예측한 대로 유저가 모이지 않는 것ㅠ 등
이런 양상은 물론이고 영화와 프로덕트가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뾰족한 시선으로 사람들에게 임팩트를 주는 것.
근데 이제 스타일(약간의 간지와 은은한 불편감)을 곁들인.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왜 비슷하다고 느껴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글로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감은 빅데이터라 분명 이유 없이 느껴지는 게 아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