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03일

변명하지 않을 결심

By In DAILY

매주 영화 한 편을 보고 에세이를 쓰는 수업이 있었다. 감상문이 아니라 영화에서 발견한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A4 한 장짜리 짧은 글을 쓰는 것이 숙제였다. 요소는 서사, 오브제, 영화 이면의 설정이나 배경 등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대신 합당한 근거를 같이 제시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어떤 식의 글을 썼는지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다. 서부극이었는데, 전쟁 중 주인공이 임신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을 한다. 이 장면은 겨우 두 컷 정도로 짧았고, 눈 깜빡하면 못 보고 지나갈,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서사가 아니었다. 당시 영화에 이유 없는 장면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어서 유독 거슬렸다. 그 찰나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몇 번 더 본 후, 아마도 여자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유산을 했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전쟁에서 중요한 건 남성이다. 이겨야 하니까. 식량이 부족한 전시상황에서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승리에 보탬이 되지 않는 설정이므로 유산을 함으로써 여성도 승리에 일조할 수 있게 했다고 썼다. 이 외에도 호송 마차에 남자아이들부터 타게 했다거나 유산을 했던 주인공이 영화 후반부에 무사히 낳은 아이는 남자아이였던 장면도 나열했다. 이런 식의 수업이었다.

에세이를 쓰면 선생님으로부터 답변이 온다. 글을 교정해 주는 식의 피드백이 아니라,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과 그 생각에 대한 이유, 아쉬운 점, 더 나아가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편지 같았다. 다시 생각해도 좋은 수업이었다. 오히려 지금 듣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당시의 나는 많이 어렸다.

첫 번째 영화를 보고 쓴 에세이에서 거의 한 달을 머물렀다. 선생님이 주신 피드백에 잘못 이해하신 부분이 있었다. 수업은 계속되었지만 무시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무엇을 잘못 이해하셨는지 꼬집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편지의 시작은 “정윤 학생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걸 설명하는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였다. 나는 다시 답장했다. “왜 중요하지 않다고 하세요. 그건 저한테 중요한데요. 그래서 오해가 없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겁니다.”

왜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거지? 꺾이지 않고 과거에 매달려있는 나에게, 집념도 있고, 당돌함도 있고, 주장에 힘을 실을줄도 안다고도 했다. 아니,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고 그게 그 말이었군요라니까요. 혼자 거듭하던 진실공방은 맥없이 끝나버렸다. 내가 영영 못 알아들을 것 같았던지 선생님은 이렇게 남기셨다. “정윤 학생의 생각을 고대로 받아들이는 게 글을 주고받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들 의도대로 읽어내지 않았다고 독자를 탓하는 건 아니지요? 그나저나 다른 영화에 대한 정윤 학생의 생각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아, 혹시나 하는 말인데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지난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써서 보내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지나갔으니까요. 물론 써서 보낸다고 해도 괜찮긴 하지만요.”

진심으로 창피했다. 얼굴도 빨개졌고 지난 한 달간 휘갈겨 쓴, 이해를 종용한 호소문이 부끄러웠다. 왜 내 생각이 상대에게 고대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의도와 다르게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오만했다. 막말로 내 실력이 부족한 것을 남 탓으로 돌려버리다니. 무지했다. 게다가 내 세계를 확장할 기회도 놓친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기억조차 못 할 일로 억울해 하느라, 한 달을 날려버렸다.

살면서 변명을 하고 싶은 순간은 무수히 많다. 정정이 아니라 변명이라고 느껴지면 참아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결심까지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억울할 때 말을 참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나를 떠난 생각과 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고 되뇐다. 집착하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나를 더 다듬자고 다짐한다. 겨우 한 학기 수업이었지만 여전히 곱씹으며 살아간다.

Written by hershey

안녕하세요 걀걀걀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