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청소신이 깃들었다.
베란다 청소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맨발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슬리퍼를 둔지 어언 몇 달.
당연히 베란다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곳이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찝찝했다.
베란다말고도 지저분한 게 또 있었다.
화이트 우드 블라인드가 어느새 그레이 우드 블라인드가 되었다.
집에 청소 할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니 늘 우선순위가 밀렸었다.
내가 거인이 되어 집을 통째로 물에 넣고 빡빡 씻어 꺼내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다 임계점에 다다랐다.
어제는 블라인드와 베란다 바닥을 닦지 않으면 정말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어떤 기분이냐면 도저히 못 참아주겠다는 느낌이다.
살짝 분노에 가깝다.
원래라면 너무 늦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A가 나를 말렸을 텐데, 대신 딱 10시 30분까지만 치우라고 했다.
이럴 때 나를 말리면 청소의 신이 분노의 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베란다에 있던 모든 짐들을 꺼내서 정리하고 버렸다.
(대학교 입학하면서 샀던 가방도 버렸다ㅜ)
세숫대야에 깨끗한 물을 담아와서 베이킹 소다 물티슈에 살짝 묻힌 뒤 블라인드를 닦았다.
물이 블라인드를 타고 주륵 흘렀다.
내려올수록 점점 더 검정물이 됐다.
짜릿했다.
블라인드 살 하나씩 잡고 쫙쫙 닦았다.
그랬더니 제 색을 되찾았다.
블라인드가 깨끗해져서 바닥이 더 처참해 보였다.
물을 촤락 붓고 검댕이 묻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밀대질을 했다.
첫 밀대질에 #FFFFFF였던 물티슈가 #000000이 되는 걸 보고 면역력이 좋았던 거구나 생각했다.
10번은 넘게 걸레질을 했다.
결국 11시가 넘었다.
장장 두 시간 반 만에 베란다가 발도 디딜 수 없는 곳에서 누울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청소의 신이 만족하고 나를 놔주었다.
그 기세를 몰아 화장실 청소까지 끝냈어야 했는데, 체력이 고갈 나서 그런가, 생각보다 일찍 떠나셨다.
몸살이 날까 봐 걱정했지만 혓바늘 정도로 끝났다.
이만하면 선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