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울을 타며 살다 뭍에 내리니 땅 멀미를 했다.
옛날에 썼던 일기
이내 울렁거림은 멎었지만 수평의 세상은 지루했다.
다시 바다로 갔다.
어릴 때는 모든 게 억울했다.
내가 선택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린 선택이 어떻게 온전히 자의일 수 있겠나.
그 누구보다도 꿈이 컸던 나는(초등학교 장래희망 : 피아노 치는 우주 비행사ㅋㅋㅋㅋㅋ)
평범하게라도 살게 해달라며 꽤 긴 기간 동안 분황사에 가서 절을 했다.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아서 자비로운 부처님도 날 버렸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드디어 평범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대학 시절 내내 일했던 곳에서 취직 제안을 받았다.
월급이 크진 않았지만 학교는 없어지지 않을 테니 평생직장이 담보되는 자리였다.
내가 바라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랬는데 백수를 선택했다.
그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가당찮은 이유로 말이다.
그때는 프리랜서로 영상 편집 일을 계속하고 있어서 돈 걱정은 없었다.
마침 마음 맞는 친구들도 생겼고 그동안 나이에 맞게 살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보상받겠다 합리화하며 미친 듯이 놀았다.
어차피 예대 출신은 대기업 취직 못해.
나 미국 살다 와서 토익은 껌이야.
영화 촬영 현장은 이석증 와서 내가 할 일은 아니야.
드라마 편집 막내로 들어가서 20년 일하면 메인 편집이 되는 게 아니라 20년 일한 편집 막내 되는 거래.
어불성설을 그때는 진심으로 믿었다.
지출이 수입을 앞지르기 시작하고 통장 잔고가 마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기다리는데 마침 영상 편집 일을 주던 곳에서 정규직 제안이 들어왔다.
졸업 때 받았던 제안보다도 적은 액수의 월급에다 안정성도 보장되지 않았지만,
작은 회사의 첫 정규직으로서 자리를 잘 잡는다면 회사가 커졌을 때 관리직이 되어 편안한 중년을 보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괴팍한 성정은 어김없이 발휘됐고 2년 정도 다니다가 디그니티를 운운하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대책 없이 백수가 됐고 인정할 때가 왔다.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살지 않았던 거란 걸.
과장 조금 보태서 팔자려니 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였다.
사업.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업할 재목은 아니다.
통이 크지도 않고 과감하지도 않다.
인맥은 좁디좁고 일면 친절하지만 차갑다.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고.
근데 자부할 만한 게 있다.
지구력과 가오.
지구력이 가오를 만나면 ‘못 먹어도 고’가 된다.
나는 나를 이끌어줄 머리가 필요했다.
이 모든 걸 알고 L과 A를 만나 사업을 시작했겠냐마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아오다 보니 어떤 지점에서 만난 거겠지.
LAH를 시작하게 된 것도 터무니없지만 이런 어린 선택이 절대 헛발질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다행인 건 더 이상 내가 나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고생에 억울해하는 아이가 아니고,
혼자였던 그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다.